1890년 5월의 어느 아침. 18세의 젊은이 카를 벨헬름 칼로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함부르크 항구의 부둣가와 하팍로이드 사의 여객선 보루시아호를 연결하는 육중한 목조 선교를 건넜다. 목적지는 멕시코였다. 스페인어라고는 단 한마디도 할 줄 몰랐던 팡 백한 피부에 개암 빛의 커다란 눈을 지닌 이 독일 젊은이는 멕시코 땅에 국보가 될 프리다 칼로라는 화가를 안겨주게 된다. 마그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칼데론은 1907년 7월 멕시코시티 남서쪽의 세련된 교외 도시 코요아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 벨헬름 칼로는 1872년 10월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포르츠하임의 독일 세공장인ㄴ 가문에서 출생했다.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재혼 이후 가족과의 사이가 서먹해지고 추락사고와 그 후유증으로 일어난 간질 때문에 뉘른베르크에서의 학업생활을 계속할 수없게 되자 빌헬름은 조국과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젊은 나이에 멕세코로 떠났다. 그는 새로운 출발 새로운 삶을 원했다. 빌헬름이라는 이름을 기예르모로 바꾼 그는 멕시코 여인 마리아 카르데냐와 결혼해 맏딸 마리아 루이사를 얻었는데 아내는 둘째 마르가리타를 낳다가 사망했다.
빌헬름은 라페를라 보석 세공 상점 동료인 매혹적인 여성 마틸데 칼데론 이 곤잘레스와 재혼했다. 마틸데는 오악사카 출신으로 어머니는 스페인 장군의 딸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아버지는 인디언 혈통으로 모렐리아 출신이었다.
빌헬름은 장인의 사진관을 물려받아 보석 세공 상점일을 그만두고 사진사 일을 시작했다. 마틸데와의 사이에는 네 딸이 더 태어났다. 마틸데, 아드리아나, 프리다, 그리고 크리스티나였다. 빌헬름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니 프리다가 태어나기 전 한 살 때 죽고 말았다. 출산은 힘겨웠다. 넷째 아이 프리다를 낳은 것은 아들을 잃고 난 후로 마틸데 칼데론은 난관 위축으로 고통을 겪었다. 해산 후 마틸데는 앓아누웠고 아기는 인디언 유모가 돌보게 되었다. 그녀는 아이를 돌볼 수 없을 만큼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렸다. 따라서 프리다와 크리스티나를 늘 돌봐주었던 것은 두 언니 마티타와 아드리아나였다.
프리다가 자라난 카사아술, 즉 푸른 집은 그녀가 태어나기 몇 년 전 아버지가 지은 아름다운 저택으로 론드 레스 가와 아옌데가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자들뿐인 가족으로 파티오를 통해 단단히 닫힌 집안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어머니의 전제적인 지배를 받았다. 프리다는 어머니를 엘 헤페라고 불렀고 그 뜻은 우두머리였다. 열두 자녀의 맏딸로 형제자매를 돌봐왔던 마텔데 칼데론은 모성적인 자애로움이나 부드러움이라고는 전혀 몰랐고 전처가 낳은 두 딸도 돌봐주기를 거부했으며 마르가리타를 수녀원에 맡겨버렸다. 마틸데는 가톨릭 신앙에서 힘을 얻었다. 딸들을 이끌고 꼬박꼬박 집 가까이에 있는 성 세례 요한성당에 나갔고 끼니때마다 식사기도를 드리도록 했으며 매년 부활절 피정 기간을 가졌다.
어머니는 종교문제에 대해 히스테리적이었다라고 프리다는 항상 말했다. 늘씬한 몸매 가냘픈 체격에 숭고함을 띤 두 눈동자, 예쁘장한 자태를 지닌 그녀는 굉장한 미인이었으며 총명했지만 문맹이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마틸데는 딸들에게 요리, 바느질, 수놓기 집안 살림을 가르쳤다. 그녀는 전제적이고 히스테리적이었으며 심지어 잔혹할 때도 있었다. 오늘날이었다면 단 하나 마디로 욕구불만 상태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프리다도 일찍이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프리다 앞에서 러시아 가죽으로 ㄷ장정한 책을 펼쳤던적이 있는데 그녀는 그 책 안에 첫사랑이었던 독일 청년이 보낸 편지를 몰래 보관해두었다. 그러나 첫사랑은 연인이 그녀의 눈앞에서 자살하면서 비극적으로 끝났다. 가끔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연약한 성품의 독일 청년인 기예르모와 결혼함으로써 그녀는 비극적인 과거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걸까.
어머니 앞에서는 두려움과 갈망이라는 분열된 감정을 느꼈던 프리다가 따스함과 애정을 찾고 특히 독일식 교육위 기초를 다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곁에서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뻣뻣하고 점잔 뺀ㄴ 태도와 독일인다운 까다로운 행동방식을 장난스럽게 놀리며 애정을 담아 헤어컬로 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단 하나뿐인 아들의 죽음 이후 태어난 프리다는 어떤 면에서 아들 역할을 해주었으며 상속자였고 아버지 기예르모가 희망을 걸 수 있는 존재였다. 그는 딸들의 국적을 모두 멕시코로 정했지만 밑의 두 딸은 멕시코에 있는 독일학교에 보냈다. 프리다가 태어났을무렵 그는 상당한 지위에 올라가 있었다. 아내의 강권에 떠밀리고 멕시코의 독일인 공동체 내에서 아마추어 사진사로 거둔 성공에 힘입어 예술사 진가가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장인 곁에서 일했지만 이후에는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임명을 받아 멕시코의 문화유산을 촬영하는 수석 공식 사진사가 되었다. 기예르모는 습관을 철저히 지키는 사나이였다. 매일 아침 일찍 마틸데가 싸주는 도시락을 들고 집을 나서 작업실이 위치한 시내로 향했으며 매일 저녁 같은 시간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면 대개 틀어박혀 피아노 앞에 앉아 베토벤이나 빈 왈츠를 연주하고 나서 아내의 시중을 받으며 혼자 저녁식사를 했다. 그는 체스 두기를 즐겼고 서재에는 유럽 대문호들의 작품을 갖추고 있었다. 주로 괴테 쉴러 니체와 쇼펜하우어 등 독일 철학자들의 책이었다. 책상 위에는 거대한 쇼펜하우어의 초상화가 걸려있어 마치 정신적 아버지처럼 보이는듯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쓴 이 철학자는 기예르모가 딸에게 물려준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프리다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철학은 인간을 신중하게 하고 자신의 책임을 떠맡도록 돕는다라는 것을 배웠다. 그는 아이들에게 침묵과 질서를 요구했으나 이 침묵은 육 주마다 일어나는 그의 간질 발작으로 깨지곤 했다. 어떠한 설명도 없는 가운데 자녀들은 그를 무시무시한 미스터리로 여기게 되었다. 여설 살 때 소아마비를 앓은 프리다는 활발하며 토실토실한 두 뺨에 미소가 가득했었지만 아홉 달이나 병상에 누워있게 되면서 모든 것은 오른쪽 다리를 덮친 끔찍한 통증으로 시작되었고 통증은 발의 근육까지 퍼져나갔다고 했다. 하얀 침대보 다양한 치료요법들 의사들 그리고 고통이 이때부터 그녀의 삶 속에 들어왔다. 프리다는 회복되었지만 한쪽 다리는 쇠약해져 결국에는 다리를 절게 되었다. 동네 아이들은 프리다 파타 데 팔로 즉 나무다리 프리다라는 별명으로 그녀를 놀렸다. 그녀는 몹시 가냘팠고 항상 빛나던 검은 눈의 시선은 이따금 다른 곳을 보는듯했다. 아이가 앓는 동안 몹시 걱정하며 마음을 썼던 기예르모 칼로는 딸이 기력을 되찾고 근육을 회복하도록 스포츠를 이용한 프로그램을 짰다. 사내아이들처럼 롤러스케이터와 자전거를 타는 것이 프리다의 일상이 되었으며 기예르모는 딸을 데리고 뱃놀이를 가거나 공놀이를 하고 몸싸움을 하게 하기도 했다. 프리다는 나무 타기를 무척 좋아했으며 집안에 없는 아들 역할을 완전히 맡게 되었다. 다리를 저는 것은 나아졌지만 다리는 여전히 몹시 가느다란 채로 남아있어서 프리다는 양말을 겹겹이 신고 높이 올라오는 장화를 신어 다리를 감췄으며 나중에는 바지와 남성복을 입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이를 극복할만한 불굴의 의지와 끈기가 있었지만 여전히 상처가 남아있었기에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다. 그래서 프리다는 늘 혼자였다.
병을 앓는다는 경험 프리다가 창조한 고독의 공간 그리고 외부의 소란스러움과 동떨어진 내면의 세계, 고립을 지속시키는 내면의 심원함. 기예르모와 프리다가 가까워진 계기는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아버지의 곁에서 프리다는 사진기 다루는 법을 익혔고 이후에는 필름 현상하는 법, 음화를 보정하고 색을 입히는 법을 배웠다. 거의 강박에 가까운 정확성이 요구되는 세심한 작업이었다. 이 버지의 일거 리위로 몸을 숙이고 열중한 어린 소녀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자화상으로 이루어진 작품세계에 천착한 한 여성화가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프리다는 여기에 마치 사진을 보정할 때 하듯, 크기가 작고 딱딱한 소재 위에 작은 붓놀림으로 아주 세밀하게 작업해 기법과 소재라는 면을 더하게 된다. 훗날 프리다가 다루는 소재는 유리판에서 금속판으로 바뀌고 작업장소 또한 암실에서 병원 회복실로 바뀌지만 사고의 경험이 그녀에게 날카로운 집중력을 발휘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프리다는 아버지가 풍경사진을 찍는 장소를 따라다녔는데 배우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필요한 경우 아버지를 돕기 위해서 이기도 했다. 프리다는 어깨에 사진기를 걸쳐 매고 손을 잡고 걷다가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는 일이 자주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길에서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을떄 돌보는 법을 배웠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끌어 주는 손이자 놓아버리는 손 프리다가 언제나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는 여인이 된 것은 항상 놓아버릴 위험을 안고 있는 이 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산책은 자연에 대한 낭만적 취향을 아버지와 공유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프리다의 눈에 자연은 삶과 보편성 만물의 자연스러운 순환이 구체화된 모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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