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가 폭발직후에도 폼페이에서 값진보물을 파내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벽면에 남긴 낙서로 알수있다. 18세기의 유럽 또한 사라진 도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을 발굴하려는 열정에 사로잡혔다. 1594년 헤르쿨라네움의 폐허가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나폴리에 부왕을 파견해서 남부 이탈리아를 지배했다. 오스트리아의 부왕들은 구덩이와 긴 터널들을 파서 조각상을 약탈한 뒤 빈의 궁전으로 빼돌렸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않고 벽화로 장식된 벽을 허물곤 했다. 야만스러운 약탈과 도굴행위를 꾸짖고 나선 사람은 교황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양시칠리아 왕궁의 왕이자 스페인왕인 카를로스3세가 측량사 로코 조아키노 대 알쿠비에레를 스페인에서 끌어들여 값진 조각상과 보물을 스페인 궁정으로 나르게 했을때부터 보물찾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발굴초기에 폼페이를 여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놀란 유럽은 더 자세한 사실을 알고싶어했다. 카를로스3세는 폼페이발굴을 지원했고 학자들은 나폴리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1808년 뮈라가 나폴리 왕국의 군주가 되었다.왕비 카롤린은 나폴레옹의 누이였다. 고고학에 열중한 그들은 사재를 털어 발굴을 독촉했다. 학자들은 도시의 경계를 정하고 콘술 거리 인근의 외곽성벽을 발굴하고 원형경기장, 바실리카를 파헤쳤다. 나폴레옹왕가는 이전에 나폴리를 통치하던 부르봉가 출신 군주들처럼 폼페이에 열광했다. 워털루의 비극이 있기얼마전에도 카롤린은 발굴을 감독하러 폼페이에 갔을정도였다.
옛왕조가 되돌아가면서 발굴이 늦어졌다. 1815년 라 베가가 죽자 안토니오 본누치가 뒤를 이어 발굴책임자 됐는데 그가 동원 할수있는 인부는 단지 130명 뿐이었다. 그렇지만 폼페이는 유럽의 군주들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곳이었다. 폼페이를 방문한 그들은 방금전에 되묻은 건물의 발견자로 떠받들어졌다.
대이변이 발생하지 않아 갑작스럽게 인간세계에서 사라지지않았다면 폼페이는 역사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못했을것이다. 우리가 해석하려고 애쓰고 있는 수세기동안 얼어붙어있던 폼페이 사람들의 일상을 우리는 그곳에서 만날수있다. 폼페이에서는 고대가 직접 말을 건네며 날마다 벌어지는 생활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노동자들은 회반죽을 이겨 신비의 별장 지하회랑을 바르고 있었고 이시스신전의 사제들은 예식을 위해 제단을 준비하고 있다. 폼페이는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와 아주 비슷한 남자와 여자들이 가졌던 여러가지 직업과 감정과 꿈과 환상을 찾을수 있기때문이다. 진정한 폼페이의 기적은 끔찍한 재앙이 닥친 뒤 수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날 그 작은 도시의 기쁨과 슬픔과 희망과 공포를 생생하게 재현 할수있게 되었다는것이다. 이 작업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로마인의 취향에 맞춰 정원이 차지하는 면적이 점차 늘어났다. 정원은 푸르름과 신선함을 가져다 주었고 꿈과 낭만을 제공해주었다. 어떤 폼페이 사람은 자신의 정원을 그리스군주의 궁전 뜰고 꼭같이 꾸미려고 애쓸정도였다. 플라타너스, 실편백, 송악, 월계수, 협죽도 같은 식물은 큰 공원에 맞먹는 효과를 주었고 한편 덤불숲과 화단의 조화로운 배열은 정원을 건축물처럼 돋보이게 하려는 욕망을 충족시켜주었다. 소벽화와 벽화를 통해 정원에서 드러난 자연미와 인공미를 실내로 끌어들이려는 폼페이인의 의도를 짐작할수있다.
폼페이의 최고 권력가는 두명의 이두정치가였다. 이두정치가는 합벅적인 판결을 내리고 공공자금을 관리하고 시의회의 의사진행을 담당할 의무를 지니고있었다. 두명 이상의 행정관이 도로보수 시장의 관리감독, 질서유지들을 담당하며 이두정치가를 보좌했다. 관리들에게는 중앙대광장에 사무실과 문서보관실로 사용할수있는 건물이 할당되었다. 마찬가지로 중앙대광장에 있던 쿠리아회는 시의회의 모임장소였다. 시의회는 대부분 행정관을 역임했던 백명의 열명으로 구성되었다. 입법기관으로 활동한 쿠리아회에서 만든 법령은 자치정부의 책임자인 두명의 이두행정가가 수행하는 통치권과 행정권에 정당성을 줄수있는 근거로 작용했다. 해마다 7월이 되면 폼페이시민들은 시행정관을 뽑기위해 투표를 했다. 봄부터 도시는 선거로 달아올랐고 벽이란 벽은 붉은색 아니면 검은색으로 칠한 선거벽보로 뒤덮혔다. 지정게시판이 없었기때문에 시민들은 그들이 지지하는 특정정당 의 후보자를 위해 시민의 집 정면을 제공해주었다. 같은 구역의 주민들은 홍보집단을 고용해 종종 지난해 적어둔 광고문구를 지우기 위하여 벽에 회칠을 했다. 이럴경우 때로는 밤샘작업이 필요했다.
폼페이부자들의 재정상태를 좀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몇몇집에서 찾아낸 회계장부를 연구해야 할것이다. 발굴단은 스타비아나 거리 동쪽에 있는 은행가 유쿤두스의 집에서 서판150여점을 찾아냈다. 서판들은 원래 얇은 밀랍으로 덮여있기 떄문에 타불라이 체라타이라고도 불렸는데 거기에 남아있는 첨필로 새긴 기록으로 내용을 해독할수있었다. 그것은 52년부터 62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유쿤두스 자신 , 그의 비서, 대출을 받은 사람이 발행한 영수증 이었다.
유쿤두스는 도매업자에게 자본을 빌려주고 수수료를 받았다. 식민지로 부터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는 청부업자이기도 한 이 은행가는 귀족계급에 속한다고는 할수없지만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는 부유한 계층에 속했다고 생각할 수있다.
폼페이 주민의 부는 그들이 재앙을 피해 도망치던 순간 몸에 지니고있던 보물들을 돈으로 환산함으로써 계산해볼수도 있다. 이러한 계산에 따라 폼페이의 보통 시민이 위급한 순간에 재빨리 현금으로 준비할수있는 액수는 3000에서 10000세스테르티우스임을 알수있다. 큰 액수이건 작은 금액이건 가난한 사람들은 음식을 사먹을 수 있을정도인 구리돈 몇푼을 지니고 있었다.
베티우스 집에서 발견된 큐피드가 등장하는 벽화는 폼페이 장인들의 다양한 활동을 상징하고있다. 약사를 나타내는 큐피드는 유리병속에 든 조제약을 흔들고있다. 약국의 약장 속에는 위험한 약이 보관되어있다.
실업자는 없었을까, 진정한 뜻의 실업자는 아주 드물었다. 최소한의 일자리는 언제나 있었는데 하다못해 풀말리기, 가을걷이, 포도따기, 등 계절에 따른 일거리라도 언제나 있었다. 물론 사르노강에 위치한 폼페이 항구에 배가 들어오는 때에는 많은 일꾼들이 고용되었고 특히 지진이 발생한 뒤에는 복구작업이 완전 고용을 보장해주었다. 고대 지중해사회는 공공의 자선에 힘입어 살아가는 거지난 장애인이 있었다. 특히 폼페이에는 거지나 장님이나 불구자가 굶주리지않았다. 그들의 기본적 필요를 충당해줄수 있는 동전 몇닢, 빵조각, 따뜻한 국물이 언제나 제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예가 8000명 자유민이 12000명이던 폼페이의 총인구는 2만명이었다. 폼페이에서는 수세기 동안 그리스인 에트루리아인 오스크인 라틴인들이 그리고 부자와 빈자가 행복하게 뒤섞여 살았다. 그곳에는 계급투쟁 인종차별이 없었다. 해방노예와 노예도 주민의 재산일부를 나눠받을수 있었으며 경제적 상호의존성은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을 보장해주었다. 더욱이 폼페이의 기본적인 식료품가격은 로마제국의 다른 도시들보다 저렴했기때문에 생활에 많은 여유를 가질수있었다.
꽃줄장식이 중앙대광장의 주랑을 화려하게 수놓았고 상인들은 포도위에 좌판을 벌여놓았다. 구두장이가 자기앞에 놓인 긴 의자위에 앉아 신발을 사려는 여자고객에게 제품의 자랑을 늘어놓는다. 하녀를 거느린 부잣집 마나님이 누더기옷을 걸친 눈먼 거지에게 적선을 한다. 펠릭스의 집 프레스코화는 집안에 들어앉아있는 여인만이 아니라 거리로 나선 여인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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