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좀머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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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하게 재미

좀머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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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내가 좀머씨와 같은 시절을 살았다면 나도 그랬었을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좀머씨와는 다른 이유가 됐겠지만 목적 없는 길을 끝없이 돌고도는 좀머 씨를 약간은 이해가 될 것도 같다고 감히 생각해봅니다. 오래전 인터넷이 없던 시절 딱 한번 운 좋게 긴 시간을 아무 말 없이 물가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그 감정과 감성과 느낌과 냄새와 공기의 흐름과 땅의 움직임과 바람의 소리, 그 고즈넉함이 지금도 느껴지고 그립고 꼭 한번 더 경험해보고 싶은 그리운 추억이 됐습니다. 처절하기까지한 좀머씨의 걷기와는 비할수가 없겠지만 인터넷과 휴대폰과 티비와 라디오의 소리가 범람하고 있는 지금은 아마도 나 스스로도 큰 맘먹지 않으면 불가능하겠지요. "좀머씨 이야기" 이 소설은 아름답고 소중해서 눈물이 난다고 하면 맞을까요.. 저에겐 그런 책입니다.

좀머 씨 이야기


소설의 어린주인공은 좀머씨가 이해가 안 됐을 겁니다. 이유 없이 1년 365일을 끝없이 돌고도는 아저씨가 그냥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 겁니다. 주인공이 나무 타기를 좋아하고 나무 위에서 책을 읽고 빵을 먹고 숙제도 하고 그러던 시절, 좀머씨는 아직도 아랫동네와 윗동네까지 온 동네를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부인은 톱밥으로 작은 인형을 만들어 돈을 벌고 좀머씨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계절에 상관없이 계속 걷기만 합니다. 3월에 좀머씨의 다리는 푸른 강줄기 같은 힘줄이 비칠듯한 흰색이었고 7월이 되면 흰색이던 다리가 캐러멜색으로 변해 껍질 벗겨진 호두 나뭇가지처럼 보이는 다리로 계속 걷기만 합니다. 좀머씨의 키만 한 지팡이를 크게 짚으며 배낭엔 빵 한쪽을 넣고 끝없이 걸어 다닙니다. 마을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다니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자가용을 굴리게 된 시절이 왔지만 좀머씨는 계속 목적 없이 걷기만 합니다.

주인공의 아버지도 강박증이 있어보입니다. 절대 틀에 박힌 말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어느 폭풍우가 내리치던 날 운전을 하며 폭풍우 속에서도 계속 걷고 있던 좀머씨를 만나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얼른 차에 타세요. 그러다가 죽겠어요!"라는 틀에 박힌 말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좀머씨가 힘겹게 말합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주인공의 아버지는 본인도 짐짓 놀라 그런 틀에박힌 말 때문에 좀머씨가 타지 않았을 거라며 치부해버립니다.

좀머씨는 아주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어도, 혹은 어떤 잘못을 했었어도 보통의 누구나처럼 그냥 적당히 덮어놓고 적당히 잊으면서 살면 될 텐데 그 어떤 일들을 견뎌내지 못하고 이처럼 그 일을 계속 피해서 도망 다니는 듯 걷기만 하니까요.

어린 주인공이 같은 반 여자 친구와 하굣길을 동행하기로 한 후 계획을 짜며 준비하는 상황들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주인공이 생각하는 하굣길의 아름다운 여러 장소들을 정해놓고 그것을 여자 친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계획하다가 급기야는 데이트 끝에 작별의 선물을 건네줘야 할 순간까지 계획을 합니다. 작별의 선물로 준비한 것이 "작은 드라이버"라는 장면에서는 정말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로 순수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결국엔 데이트가 시작되기 직전 여자 친구 카롤리나는 아무렇지 않게 데이트를 취소해버립니다. 어린 주인공의 심정에 너무나 이입이 되어 이 여자 친구가 얄밉기까지 합니다.

그로부터 1년 후 주인공은 키가 커서 자전거를 탈수 있게 됐습니다. 아니 자전거를 타야만 합니다. 피아노를 배워야만 했기 때문이죠. 허리는 굽었고 백발의 머리에 피부는 쪼글거리며 코밑에는 까만 솜털까지 있고 심지어 앞가슴까지도 없는 아직 미혼인 마리아 루이스 풍켈 선생님에게요. 엄격한 마리아 루이스 풍켈 선생님을 피아노 연주로 만족시키긴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피아노 수업 중 선생의 코딱지가 건반에 붙어버려 주인공이 고민하다가 선생님을 노엽게 만든 장면은 어린 주인공의 사고가 너무도 정확하고 정돈되어 내 마음에까지 분노를 치밀게 했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에게조차 원망을 내뱉다가 이렇게 자기를 망가지게 내버려둔 세상을 향해 조롱을 합니다. 급기야 목숨까지 끊어버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황홀하게 치러질 본인의 장례식 장면까지 상상을 하며 나무 위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때 주인공은 나무 위에서 좀머 씨를 보게 됩니다. 허겁지겁 입으로 욱여넣는 빵 쪼가리와 물을 들이키는 좀머씨를요. 그러곤 주인공이 생각을 바꾼것 같습니다. 저렇게 필사적으로 죽음에게서 도망치려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죽을 생각을 하다니!!

그로부터 몇년이 지나 키가 아주 커져버린 주인공은 나무를 타지도 않고 기어가 3단까지 있는 경주용 자전거를 타게 됐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어느 날 자전거의 쇠사슬이 빠져버려 수리를 하고 더러워진 손을 나뭇잎에 닦기 위해 호숫가에 있는 단풍나무로 가는 도중 주인공은 좀머씨가 호수로 들어가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주인공은 아저씨를 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좀머씨는 서서히 호수 속으로 가라앉았고 그의 밀짚모자만이 호수 아래쪽으로 떠내려갑니다. 주인공은 도울 생각도 도움을 청할 생각도 못합니다. 주인공은 폭풍우치던 날 좀머 씨의 말을 정확히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주인공의 아버지도 강박증이 있어보이고 마리아 루이스 풍켈 선생님도 강박증이 있어 보입니다. 하나씩 살펴보자면 이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도 또 우리들도 모두 각자 나름대로의 강박이 있습니다. 그저 때로는 철저히 숨기기도 하고 가끔은 내보이기도 하며 그렇게 살아내고 있습니다만 너무도 여린 좀머씨는 조금만 더 견뎌냈으면 좋았을 것을 그만 피하지 못하고 결국에 죽음으로서 피해버립니다. "좀머씨이야기" 아름답고 소중하지만 마음 아픈 이야기입니다. 현대사회를 살아내고 있는 우리들 모두 어쩌면 좀머씨처럼 계속 어떤 것을 피하며 또 어떤 것에서 도망치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요? 부디 끝까지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그런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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